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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방

한대수앨범 - 멀고먼 길

 

아티스트 : 한대수

음반 이름 : 멀고먼-길

음반 구분 : 정규, studio - 1집

발매 일자 : 1974 / 대한민국

 

 

수록곡들

Side A

1. 물 좀 주소!

2. 하룻밤

3. 바람과 나

4. 옥이의 슬픔

 

Side B

1. 행복의 나라

2. 인상

3. 사랑인지?

4. 잘가세!

 

  

 

물좀 주소

 

하룻밤

 

바람과 나

 

옥이의 슬픔

 


행복의 나라로

 

히피문화는 베트남전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됐다. 기존의 관념과 가치관에 대항하던 히피문화는 ‘청년문화’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유입되며 큰 사회적 변혁을 몰고 왔다. 무명에 불과했던 신중현이 ‘펄시스터즈’를 발판으로 ‘신중현사단’이라는 철옹성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1968년이다. 그해 트윈폴리오와 더불어 미국에서 건너온 한 장발 청년은 한국 포크사에 이정표를 제공했다.

 

바로 ‘한국 모던 포크의 개척자’ 한대수의 등장이다. 그는 외국 히트 팝의 번안곡 부르기에 급급했던 당시 대중음악계에 결정타를 날렸다. 귀국 첫 무대는 TBC TV PD 이백천의 주선으로 출연한 ‘명랑백화점’. 당시 TV에 나온 그의 모습은 자신의 어머니조차 부끄러워 울음을 터트렸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온통 장발의 그가 여자냐 남자냐며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보는 듯했다. ‘주간 중앙’은 ‘최초의 히피, 한국에 등장하다’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고, 곧 ‘우리나라를 떠나라’는 비난여론까지 비등했다. 당시 아무도 그가 진지하게 세상의 고민을 노래하는 싱어송라이터임을 알지 못했다. 69년 9월 두 여대생의 도움으로 ‘옥이의 슬픔’ ‘행복의 나라로’ 같은 창작곡은 물론 톱으로 연주를 한 전위적인 남산 드라마센터 공연을 열었다.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들쑤셔 놓은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후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힌 그의 공식무대 활동은 금지되었다. 음반발표는 언감생심, 서울과 지방의 대학가에서만 노래를 계속했다. 먹고 살기 위해 디자인포장센터에 취업했지만 날벼락 같은 입대영장이 날아와 3년간 해군 수병으로 복무하며 완전히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74년 제대 후 그는 가수가 아닌 김민기의 ‘바람과 나’, 양희은의 ‘행복의 나라’ 작곡가로 변해 있었다.

 

국내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6년 만인 74년에야 1집이 만들어졌다. 김진성의 주선으로 신세계레코드를 통해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음반작업에 필요한 시간은 8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여성포크가수 방의경의 기타를 빌려 드럼 권용남, 베이스 조경수, 첼로 최동휘, 피아노와 플루트 정성조의 탄탄한 라인업과 4트랙 동시녹음을 했다. 우선 파격적인 앨범 재킷이 압권이었다. 사진작가인 자신이 촬영한, 거친 입자의 흑백사진 속의 자화상이 삐딱하게 클로즈업되어 있는 이미지는 강렬했다. 앨범사진과 타이틀곡은 자신이 걸어야 될 험난한 길에 대한 예고였다.

 

총 8곡의 수록곡 중 소홀히 넘길 곡은 단 한곡도 없다. 불협화음의 연속인 ‘물 좀 주소’는 한대수가 연주하는 생소한 카주(전자 풀피리소리의 느낌) 소리와 함께 자유와 사랑을 타는 목마름으로 호소했지만 끝내 탄압과 금지라는 현실에 절망하는 절규의 목소리가 되었다. 김민기가 먼저 취입한 ‘바람과 나’의 한대수 버전은 정겨운 하모니카 소리와 함께 서정적인 포크 질감을 선보였다. ‘옥이의 슬픔’에서 정성조의 격조 있는 플루트 선율과 투박한 한대수의 경상도 억양이 빚어내는 소리의 향연도 들을 거리다. 17세 때 만든 ‘행복의 나라’는 한국 대표 포크송이 되었다. 가수의 대표곡은 인생을 좌우한다고 했던가. 그는 환갑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마음껏 음악활동을 하며 자식까지 낳으며 행복의 나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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